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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 걸어넘기 ▒ 백두대간을 넘는 양양장 길 ▒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강원도 양양군 서면 |
현리에 들어서니 공기부터 달라졌다. 국내에서도 몇 남지 않은 청정구역으로 손꼽히는 곳. 방동리와 진동리를 거슬러 오르는 동안 개인산과 응복산∼단목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울창한 수림이 뿜어내는 신선한 물을 들이킨 방태천은 일대의 공기를 맑고 또 맑게 정화시켜 놓고 있다.
그 공기를 들이키며 연둣빛 이파리들은 시시각각으로 몸을 부풀리는 중이고. 진동리 가는 길은 안개에 휩싸여 있다. 마치 저 〈무진기행〉의 어느 구절처럼 ‘적군처럼 진주해오는’ 안개 더미였다. 그 안개를 뚫고 옛 현리 사람들이 넘던 양양장 길을 간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에서 흔들리는 동안 안개 속으로 사라진 마을, 딸랑거리는 달구지 방울소리를 더듬어본다.
달구지가 지나다녔을 우마찻길 가로 갈기조팝나무 군락이 드넓다. 흰 드레스를 차려입은 신부처럼 화사한 꽃잎이 소복하게 덮인 나뭇가지가 흐느적거린다. 방태천 옆으로는 깃털이 다 떨어져 핼쓱해진 억새들이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바람이었다. 소도 날려버린다는 ‘미친’ 바람은 아니지만 어느새 일행은 조침령 언저리에 당도한 것이다. 때를 맞춘 듯 눈앞에 자욱한 안개사이로 ‘쇠나드리교’라 적힌 입간판이 서 있다. 진동2리의 쇠나드리였다.
바람부리는 주막거리였다
쇠나드리의 딴이름은 바람부리다. 바람부리는 조침령 가는 주막거리였다. 기린면 가운데서도 현리나 방동리 또 진동리에서도 설피밭 아래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양양장을 보러갈라치면 이 바람부리에서 한 달음이면 넘는 조침령길을 택했다. 조침령길을 무시로 넘어다녔다는 박태수씨(47세)는 쇠나드리교에 조금 못미친 방태천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도회지에서 찾아오는 동창생을 마중하러 나간다며 트럭을 몰고나가다 그가 한 말을 빌리면 조침령은 “바람부리에서 서림까지 45분이면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빠른 길인 만큼 양양장을 보고 돌아오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으니 그의 말마따나 “밥을 싸서 조침령 너머 반젱이의 돌 밑에 넣어두었다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점심으로 꺼내 먹곤 했다”는 말은 괜한 과장이 아닐 터이다.
게다가 도보가 대부분의 이동 수단이었던 시절, 걷는 속도라면야 지금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빨랐던 시절이었으니까. 일행은 쇠나드리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골짜기 입구에 있다는, 김우철씨 네의 옛 주막집을 찾아간다. 옛 주막집 부엌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 집 역시 최근 진동리의 개화기를 앞두고 황토방을 짓는 등 단장중이었다.
진동리에는 곳곳에 이런 신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한전의 점봉산 양수댐 건설 공사로 진동리로 드는 길 중간중간이 포장이 된 데다 서림과 진동리를 연결하는 새 조침령 지방도가 개설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러니 폭우나 폭설이라도 내리면 여지없이 발목이 묶이고 말았던 진동리는 ‘고립’의 굴레를 속시원히 던져버릴 기쁜 시대가 머지 않은 것이다. 애통한 것은 청정구역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고 오염된다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공사중인 황토방 오른쪽 골짜기로 든다. 황토방집 뒤를 돌아오르는 옛길은 산죽이 어른의 가슴께까지 자란 등성이로 나 있었다.
앞사람이 보이지 않아 그저 서걱이는 소리만 들으며 걷고 있는데 어느새 아침 나절 안개에 젖은 산죽을 헤치고 가는 동안 옷은 순식간에 흙탕물 묻은 빗자루로 쓸어내린 듯 만신창이가 된다. 전망이 트일 법한 능선에 마침내 올라섰지만 사방은 구름 속에 잠겼다. 오래도록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옛길에는 산죽이 무성히 자라 어디가 길인지 숲인지 알 수 없다. 허나 이번 옛길 산행을 위해 일전에 미리 답사까지 한 이상곤씨(44세, 도봉백두산악회)는 늘상 다니는 길처럼 스스럼없이 앞장서간다.
그래 산죽을 제끼고 속을 들여다보니 용케도 그 안에는 실낱같지만 또렷한 옛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수십년 동안 오고간 발자국의 흔적은 그리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일행중 키가 가장 커 산죽 위로 머리를 내민 태백의 정이호씨(61세, 태백한마음산악회)와 야생화를 촬영하러 왔다가 취재팀과 동행하게 된 김건래씨(28세, 한국생명공학연구원)가 둘러멘 삼각대를 이정표 삼아 한달음에 조침령에 올라선다.
조침령을 전후한 능선은 백두대간에서도 오르내림이 심해 힘들기로 악명 높은 구간. 마을 사람들에게는 한낱 잊혀진 고개일지언정 이곳에 나붙은 형형색색의 표지기를 보면 저절로 백두대간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고개는 주변의 악명 높은 산세 때문인지 덩달아 ‘좇칠령’이라는 애매한 이름도 얻기도 했는데…. 60년대만 해도 진동분교가 본교였을 정도로 진동리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니 집안 일이 생기거나 명절 때마다 오죽 이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을까.
박태수씨가 일러준 고개에 있었다던 돌무덤은 무성한 산죽과 억새에 덮여버려 찾을 수가 없다. 대신 고개에는 파릇하게 돋아난 잎 사이로 은은한 아이보리색의 은방울꽃이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 조침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한계령에 다다르기 전 북암령과 단목령 등 2개의 고개를 더 지나간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고개가 모두 양양장을 가던 고갯길이라는 것. 특히 인제읍이나 현리 혹은 귀둔방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고갯길 통로였다.
이중 북암령은 거리는 멀지만 소도 끌고 넘을 만큼 길이 완만하고 편해 가장 많이 이용되었고, 단목령은 오색으로 곧장 내려가는 가파른 길을 따라야하니 급한 용무가 있거나 건각들이 선호하던 지름길이었다.
점심이나 먹고갈 겸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상곤씨가 “우리집에 가서 먹으면 좋은데… 이 백두대간을 따라 단목령까지 가면 바로 우리집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가 사는 곳은 단목령에서 진동리로 10분 정도 내려가다 만나는 첫집인 오두막집. 단목령에 있는 ‘檀木嶺’이라 새겨진 예쁜 목각 안내판도 그가 손수 만들어 세워 놓은 것인데, 이씨는 자신의 집을 ‘설피민국’이라 부른다. 이씨가 진동리에 정착한 지는 올해로 6년만.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우연히 진동리를 보게 된 후 스무 차례 이곳을 답사한 끝에 살기로 결정했다”는 그는 이제 진동리 강선리 곰배골 등 점봉산과 백두대간이 빚어놓은 이 오지의 골짜기는 물론 ‘숨은골’의 비경도 보았을 정도로 ‘점봉산인’이 다 되었다. 백두대간 이야기며 야생화 얘기며 5월 말이면 야생화 천국으로 변하는 곰배령 등 얘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고개에 도착한 지 시간 반이 훨씬 넘었다.
여직 구름은 조침령 위를 서성거리고 있고 일행은 3시가 다 되어 서림으로 향한다. 골짜기로 내려서자 온통 노란 세계다. 발목께를 덮을 정도로 자란 동의나물 군락지대였다. 나뭇잎들이 보드라운 연둣빛을 내며 골짜기는 봄의 절정에 와 있다. 봄의 서정이 이런 것인가. 일행들이 느긋하게 다투듯 핀 꽃들을 감상하는 동안 김건래씨는 사진 찍으랴 연구용으로 사용할 꽃 수술을 채집하느라 바삐 움직인다.
산판길 흔적을 따라 서림 마방터로
오래전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나뭇잎이 골짜기를 소복하게 덮고 있었지만 사람의 발자국이 지나간 흔적만은 또렷하니 길 찾는데 어려움이 없다. 햇살이 비쳐들자 골짜기가 연둣빛 차양을 드리워놓은 양 화사해지니 마음까지 환해진다. 오염원이 있을리 만무한 이런 계곡을 두고 ‘청정구역’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이름모를 작은 폭포를 감상하며 넓은 암반이 펼쳐진 계곡을 지나자 축대가 무너져내린 산판길이 나왔다. 숲은 사람이 힘들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알맞게 우거져 있다.
20여년전에 생겼다는 이 산판길로 나무를 간벌해낸 덕분일까. 낙엽 더미를 훑고 가다가 호젓한 숲속길이 나타나다가 이내 또 계곡을 건너기도 한다. 고개서부터는 줄곧 내리막길이지만 걸어도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이 조침령 내리막길이다. 나물취 곰취 어수리 당귀 등 싱싱하게 자란 산나물이 미각을 자극한다.
멀찌감치 골짜기 입구의 하늘이 보인다. 쉬며 놀며 내려온지 1시간 40분 가량. 벌통 2기가 서있는 합수점을 지나자 집터가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길은 오솔길처럼 수월해졌다. 골짜기를 혼자 산책나온 산불감시원 김성재씨(68세)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쯤이었다. 장화를 신고 빨간 모자를 눌러쓴 그는 다행스럽게도 마을 이장까지 지낸, 고갯길 내력에 훤한 사람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골짜기 곳곳에는 화전민들이 들어와 살았는데 피난처로도 곧잘 이용되었다.
그는 또 조침령이란 이름에 관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이른 아침 한 산적꾼이 고개를 넘기 위해 아침거리를 해결하려 했는데 서림 쪽에서는 쇠나드리로 넘어가서 먹으라 하고, 쇠나드리쪽에서는 고개 넘어 서림에 가서 먹으라 하며 내쫓았다고 해서 ‘쫓칠령’이라 불렀습니다. 그만큼 옛날에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둥글둥글 감겨올라간 칡나무 넝쿨 주변에 둘러선 일행은 때마침 잘 만났다는양 재미있는 옛 얘기를 풀어놓는 김씨에게 붙들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진동리 새 조침령 임도 입구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갈려면 서둘러야 했다. 동네 물 저장탱크를 지나니 이내 마을이다. 옛 마방터와 마주보고 있는 임태수씨 집 앞에서 노인과 이별을 하고 국도로 나선다. 마을은 더없이 한적하다. 후천 가에 터 잡은 이 양양의 오지. 이 골짝에 구룡령을 넘어 외지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뚫린 지 제법 되었지만 휴가철을 제외하면 차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닌다. 번잡스럽지 않은 곳. 그것이 서림 사람들이 아직 옛 얘기를 간직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일지도 모른다. <글|이정숙 기자 사진|김부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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